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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소설 역마 해설 - 운명, 순응, 그리고 한국인의 삶

by shhappyday 2025. 5. 23.

김동리 소설 역마와 관련된 이미지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운명관과 이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역마 속에 나타나 운명관 운명 속에 놓인 주인공들, 그리고 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분석해 보겠다.

한국적 운명관과 ‘역마살’의 서사적 의미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운명관, 즉 ‘팔자’나 ‘사주팔자’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역마살’은 원래 사주명리학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아다닐 운명을 지닌 사람에게 붙는 말입니다. 김동리는 이 전통적 개념을 소설적 장치로 활용하여, 인물의 내면과 외부의 세계를 동시에 그려냅니다. 역마살은 단순한 점괘가 아니라,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삶의 흐름, 다시 말해 '운명'이라는 초월적 질서를 상징합니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역마살의 기운을 안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그의 어머니 옥화는 한때 떠돌이 남사당패 남자와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고 장터에서 살아갑니다. 또한 계연은 떠돌이 체장수 영감과 함께 어머니 없이 살아온 딸입니다. 이렇게 인물들은 모두 정주하지 못하고, 어딘가로부터 왔다가 어딘가로 사라지는 존재로서 묘사됩니다. 김동리는 이를 통해 운명과의 갈등을 단순한 패배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물들이 운명에 순응할 때 일종의 평온함과 구원을 얻는다는 인식을 제시합니다. 이는 동양적 세계관, 특히 한국 전통의 ‘한’과 ‘순명’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며, 서구의 영웅적 운명극복과는 뚜렷이 구분됩니다. 역마살은 인물들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인간적인 깊이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장터, 길, 혈연으로 형성된 인물의 상징적 구조

역마』의 공간적 배경은 화개장터입니다. 장터는 다양한 이들이 오고 가며 일시적으로 관계를 맺는 장소로, 한국 전통소설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장’은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의 폐쇄적 구조에서 벗어난,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서 인물들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다시 흩어지며, 우연과 운명이 교차합니다. 장터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만남과 이별은, 결국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상징합니다. 옥화는 장터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역마살 낀 장돌뱅이들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그녀의 삶은 떠돌이 남자와의 짧은 만남으로 인해 결정되었고, 그녀의 아들도 비슷한 숙명을 이어받습니다. 계연 역시 일시적으로 이곳에 머물다 떠나갑니다. 장터는 이처럼 떠돌이 삶의 무대이자, 운명의 교차점으로 기능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길입니다. 소설 말미에서 그 앞에 세 갈래의 길이 놓이는데, 각각 쌍계사로 가는 길, 구례로 향한 길, 그리고 새로운 길인 하동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는 단순한 공간적 묘사를 넘어서, 인물의 선택과 변화,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은유입니다. 성기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길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고 또 다른 삶의 리듬을 찾아 나섭니다. 이러한 배경적 요소들과 더불어 혈연관계 또한 중요한 상징 장치로 등장합니다. 계연이 그와 이복 이모라는 설정은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귀결되게 합니다. 이는 단순한 서사적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한국적 금기와 운명이라는 주제를 극화하는 방식입니다.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비극을 넘어, 존재론적 성숙의 계기로 작용합니다.

삶의 순환과 치유: 역마의 미학적 결말

역마』의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는 계연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한 뒤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엿장수가 되어 길을 떠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나서는 모습은, 단순한 도피나 체념이 아닌 일종의 자기 수용과 생의 리듬 회복을 상징합니다. 김동리는 여기서 역마살을 비극적 운명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떠도는 삶 자체가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 내재한 고유의 평온과 생명력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저주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삶을 새롭게 정립합니다. 이는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한 ‘구경적 생(求境的 生)’, 즉 생의 본질을 추구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또한 이 결말은 독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인생의 고난과 비극, 원치 않는 운명 속에서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삶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마』는 운명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는 서구적 영웅 서사가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한국적 미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